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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어느 아버지의 유언 ‘터럭, 터럭’

간천(澗泉) naganchun 2020. 11. 15. 15:08

어느 아버지의 유언 ‘터럭, 터럭’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는 해방이 되어 1년밖에 안 되는 시기라서 물자는 귀하여 구하기 어렵고 매우 살기가 힘든 세상이었다.

신발이 귀해서 자동차 타이어를 오려내어서 재래의 짚신 모양으로 만든 신발을 사다 신기도 하였다. 그러나 맨발로 신을 경우에는 발등이 벗겨지고 발이 아파서 신기에 매우 불편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짚신을 삼으시는데 나로 하여금 조리(草履)를 삼게 하셨다. 아버지는 매우 곱게 짚신을 삼아서 신곤 하셨다.

짚신을 곱게 삼으려면 먼저 재료인 짚을 잘 다루어야 한다. 여름에 라고 하는 꽃이 피기 전의 참갈대 송이를 뽑아다가 그 껍질을 가늘게 오려서 덩드렁돌’(짚을 다루기 위하여 망치(마께)로 두들기는 밑돌로서 힘센 장사가 들기에도 힘든 크기의 둥근 돌이다.) 위에서 두들겨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에 새끼를 꼬아서 을 삼고 또는 이라고 하여 발등을 싸는 부분인 울을 만들곤 하였다. 그리고 이 고장에서는 볏짚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밭벼(산도)짚을 덩드렁돌위에서 물을 품어가며 잘 두들겨서 짚빗으로 빗질을 하여 딱딱한 것이나 불순물을 제거하여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게 한다. 짚에 물을 품으며 손질하기를 서너 차례 되풀이 하여 재료를 준비하고서 신을 삼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나는 조리를 삼았다. 그런데 조리라는 것은 바닥만 발 모양으로 짚으로 엮고 그 바닥에 발을 얹어서 엄지발가락과 각지발가락 사이의 자리에 새끼 끈을 끼어 두 갈래로 나누어 복사뼈 바로 앞자리 좌우의 가장자리에 맨다. 요즘 슬리퍼 같은 간편한 신발로서 일본 사람이 싣는 발굽이 낮은 게다와 같은 모양이다.

해방되기 전에 학교에서 공작시간에 흔히 조리를 만들곤 하였었다. 그러나 1년여 동안은 그런 것을 만들지 않아서 잊어버리고 서투르지만 가르침을 받으면서 삼았다. 신을 삼을 때에는 짚을 이어가면서 날 사이에 둘러 단단하면서도 매끈하게 잘 감기게 엮고 여러 차례 힘껏 조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버지는 신발을 다 삼고 나서 신꼴을 끼고 모양을 반듯하게 하여 완성한 다음에 내가 삼은 조리를 보시고는 이런 옛이야기를 해주셨다.

옛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윗동네와 아랫동네에 살면서 짚신장사를 하였는데 장날마다 아버지가 삼은 신발은 다 팔리지만, 아들이 삼은 신발은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아무래도 아버지보다 내 솜씨가 뒤지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체의 모양을 내는 데에만 힘을 쓰고 원재료인 짚을 더 부드럽게 장만하거나 엮는 방법에는 주의하지 못한 채로 늘 아버지한테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재주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오르면 스스로가 그 재주를 향상시키는 법을 알아야 하고 더 돋보이게 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만 생각하여 한 마디도 당신의 느낌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독한 병이 나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개미 소리 같은 가냘픈 목소리로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터럭, 터럭하고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아들은 이어서 짚신을 팔아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보니 짚신에 털이 많아서 곧 마무리가 잘되지 않아서 팔리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털을 없애려면 짚을 잘 두들겨서 불순물을 제거한 부드러운 짚을 써서 짚신을 삼고, 털이 남지 않도록 주의하여 엮어야 하며 만든 후에는 다시 털을 다 다듬고 마무리를 잘한 다음에 장에 내다 팔았더니 이전보다 잘 팔렸다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나는 아버지가 만든 재료로 조리를 삼았으나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신 것이리라.

나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음미해보곤 하였었다. 옛날에도 아무리 부자간이라도 자기 직업에 대한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었구나 하는 생각과 논어에서 공자의 말 중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생각났다. 회사후소란 그리기보다도 바탕이 먼저라는 말이다. 고운 신발을 만들려면 그 재료를 잘 장만해야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거나 다 마친 다음에는 최종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요즘처럼 경쟁이 격심한 사회에서 자기의 재주를 더 효과적으로 나타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게 되는데 특히나 그 일에 대한 자기만의 독창적인 비법을 체득해서 실현시켜야 하며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은 잘 아는 문제에서 흔히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어렵다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히 생각하니까 덜 실수를 하지만 쉽다고 생각되는 문제에는 최종 마무리를 잘 하지 않아서 실수를 그대로 남기는 경우가 많다.

무슨 일이거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터럭, 터럭곧 짚신에 보송보송 남은 털을 잘 다듬듯이 마무리를 잘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비법을 확보하는 일, 관련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체득하는 일, 그리고 최종 마무리와 확인, 이 세 가지가 일을 깔끔히 처리하는 요건이 된다는 것이 이 유언이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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