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에 전투를 지휘한 <후비라이>
징기스칸의 막내아들 <데무게 오치킨>의 후예인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몽고제국 제5대 황제 <후비라이>가 일본을 원정하여 두 번이나 실패하고서도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세 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함에 따라서 마침 <나얀>이 지배하고 있던 지금의 만주지방에서는 일본원정 때마다 목재를 채벌하고 운반하여 배 짓는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이런 무모한 희생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나얀>은 반기를 든 것이었다.
이 반란은 <후비라이>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고 치명적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오치킨>왕가는 <후비라이>정권에 협조적이었고 정권의 중핵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비라이>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반란은 몽고제국으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다.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73세의 황제 <후비라이>는 스스로 병졸을 이끌고 전지에 나갈 결의를 한 것이다.
<후비라이>는 <나얀>을 타격할 결의를 하자마자 신속히 행동하여 대군을 25일 만에 <나얀>의 영토에 도착했다.
<후비라이>군이 <나얀>의 영토에 도착한 소식을 들은 <나얀>은 매우 동요하였다. 과연 73세의 노인이 결전을 결의하고 나설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후비라이>는 동요하고 있는 <나얀>군을 일격에 승부를 결정할 계획으로 코끼리 전차부대의 배후에서 코끼리 등에 마련된 가마에 태양과 달을 그린 황제기를 가마에 꽂고 기 가마에 앉아서 전군을 지휘하였다.
한편 기독교도였던 <나얀>은 십자가 군기를 내걸고 응전하였다.
마르코포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이정도로 대군이 전장에서 싸운 일은 없고, 막대한 전사자가 났다고 한다.
결과는 74세인 <후비라이>가 30세인 <나얀>을 이기고 위기를 면하였다.
붙잡힌 <나얀>은 <후비라이> 앞에 끌려 나와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몽고에서는 왕족의 피는 비록 한 점이라도 대지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멍석에 말리어 타살 당하였다고 한다.(동방견문록, 몽고제국사에서)
'일화 보따리 > 일화 보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패장의 기개 (0) | 2011.07.24 |
---|---|
돌고래 등에 타서 살아난 가수 (0) | 2011.07.19 |
고르디안(Gordian)의 매듭 (0) | 2011.06.28 |
꿈에 주공님을 만났다. (0) | 2011.06.24 |
금괴를 파낸 농부 (0) | 2011.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