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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7. 앙투안 드 라브아지에 이야기 (3/5)

간천(澗泉) naganchun 2024. 7. 8. 03:32

7. 앙투안 드 라브아지에 이야기 (3/5)

 

 

3, 프랑스혁명의 발발과 처형

 

1), 혁명의 발발

 

화학원론을 출판하던 해인 1789714일에 바스티유 습격으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당시 라브아지에는 파리에서 귀족계급의 보족대의원으로 있었다.

라브아지에는 새로운 질량의 단위에 대해서의 규칙을 결의하기 위하여 신도량형법설립위원회 위원이었다. 1790년에는 각 온도를 측정하여 체적이나 질량, 밀도를 정밀하게 정하기 위하여 증유수의 질량을 측정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라브아지에의 실험의 대상은 기체의 화학 밖에 호흡과 연소의 관계성을 조사하는 생리학적인 것으로 이행했다.

라브아지에는 징세청부인이었다. 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1791년에는 징세청부제도는 폐지되었으나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에게 재정면의 수완을 인정받아 라브아지에는 국가재정위원으로 임명되었었다. 그 직무에 당해서 라브에지에는 프랑스의 금융 및 징세제도를 개혁하려고 하고 있었다 한다.

이윽고 바렌사건(불어 ; La fuite à Varennes, 바렌국왕 일가 도망하는 사건. 17916을 거쳐서 루이 16세가 실각하자 혁명은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1792년에 라브아지에는 정부 관계의 직을 모두 사임하고 병기창에 있던 주거에서 이사하고 과학아카데미에서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프랑스과학아카데미도 혁명에 따라 폐쇄되고 라브아지에의 호흡과 연소에 관한 생리학적 실험은 도중에서 끝내게 되었다.

 

2) 투옥과 처형

 

17931124일에 혁명정부는 징세청부인 전원을 체포하기 위하여 전징세청부인들을 지명수배하였다.

라브아지에는 가혹한 징세는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부담을 경감시키려 노력했었다. 이 지명수배에 대해서 그는 자진 출두하였다. 그러나 징세청부인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투옥되었다.

 

이윽고 라브아지에는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라브아지에의 변호인은 라브아지에의 과학상의 실적을 들어서 변론했으나 재판장은 <공화국에 과학자는 필요하지 않다.>고 하여 179458일에 <프랑스 인민에 대한 음모>라는 죄로 라브아지에게 사형의 판결을 내렸다.

 

형은 그날 콩코르드광장에 있는 기로친(불어 ; guillotine/단두대에서 집행되어서 라브아지에는 50년의 생애를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