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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감상/중국 한시

左遷至藍關示姪孫湘(좌천지람관시질손상)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2. 13. 05:03

 

左遷至藍關示姪孫湘(좌천지람관시질손상)

 

 

당/唐 한유/韓愈

 

一封朝奏九重天(일봉조주구중천)

夕貶潮州路八千(석폄조주로팔천)

欲爲聖明除弊事(욕위성명제폐사)

肯將衰朽惜殘年(긍장쇠후석잔년)

雲橫秦嶺家何在(운횡진령가하재)

雪擁藍關馬不前(설옹람관마부전)

知汝遠來應有意(지여원래응유의)

好收吾骨瘴江邊(호수오골장강변)

 

--좌천 길, 남관에 이르러 질손 상에게--

 

아침에 조정에 한 마디 상주했더니,

저녁에 조주로 귀양을 가니 가는 길 팔 천 리로다.

천자를 위하여 일 그르침 막으려는 마음인데,

부디 노쇠한 몸의 여생을 애석히 여기지 않노라.

구름은 진령에 가로 걸쳐있어 내 집은 어디에 있는지.

눈이 남관을 둘러싸서 말이 나아가지 않는구나.

네가 멀리서 온 것은 뜻이 있음을 내 알리라.

내 유골을 장강 가에서 주워 모으는 것이 좋을 것을.

 

*좌천(左遷)-낮은 자리나 지방으로 물러나는 것. *남관(藍關)-남전관(藍田関) 곧 협서성 남전현 남쪽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보면 태령(秦嶺)의 북쪽에 있다. *시(示)-시사(詩詞)를 친근한 사람, 손아래 사람에게 마음 가볍게 보여줄 때 쓴다. *질손(姪孫)-자기 형제의 손. 여기서는 한유(韓愈)의 조카인 한로성(韓老成)의 아들 상(湘)을 말함. *일봉(一封)-한 통의 상주문. 당나라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舎利)를 궁중에 맞아들이려 한 일에 대하여 반대한 상주문 곧 논불골표(論佛骨表). *봉(封)-상주문. 검은 봉투에 봉하여 내는 데에 유래함. *조(朝)-아침에. *주(奏)-황제에게 아룀. *구중천(九重天)-하늘의 맨 위. 여기서는 왕궁.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구중성궐연진생(九重城闕煙塵生)’이란 구절이 있다. *일봉조주중구천(一封朝奏九重天)-한 통의 상주문을 아침에 황제에게 올렸다. *석(夕)-저녁에는. 그 날 중에. *폄(貶)-헐뜯다. 좌천됨을 말함. *조주(潮州)-광동성(広東省) 동북연안부에 위치함. 조양(潮陽)이라고도 함. *로팔천(路八千)-장안에서 조주까지의 거리. 매우 멀리 떨어졌음을 나타냄. *석폄조주로팔천(夕貶潮州路八千)-상주한 날 저녁에는 8천리나 떨어진 조주로 날렸다. *욕위(欲爲)-…을 위하여…하고 싶어하여. *성명(聖明)-황제. 폐하. *폐사(弊事)-좋지 않은 일. 폐해를 일으킬 일. 궁중에 불사리를 모시는 일을 말함. *욕위성명제폐사(欲爲聖明除弊事)-폐하를 위하여 잘못된 일을 제외시키려 했다. 그러기 위하여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상주문을 올렸다. *긍(肯)-일부러. 반어적으로 사용한다. *장(將)-…을 가지고. *쇠후(衰朽)-노쇠하다. *잔년(殘年)-여생. *긍장쇠후석잔년(肯將衰朽惜殘年)-구태여 늙은 몸이 여생을 아쉬워하겠는가. 아까워하지 않는다. *운횡(雲横)-구름이 옆에 걸쳐서. 구름이 반쯤 가려진 모습을 말함. *태령(秦嶺)-장안 남쪽에 있는 동서로 걸친 대산맥. *가하재(家何在)-인가가 어디에 있는가. *운횡태령가하재(雲横秦嶺家何在)-구름이 태령에 걸쳐 있어 어디 인가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내 집은 어디 있는가. *설옹(雪擁)-눈이 …을 싸서. *남관(藍關)-남전관(藍田関) *마부전(馬不前)-말은(쌓인 눈 때문에)나아가지 못한다. *설옹남관마부전(雪擁藍關馬不前)-눈이 남전관을 에워싸서 말은 나아가지 못한다. *지(知)-…라고 생각한다. *여(汝)-너. 형제의 손인 한상(韓湘)을 가리킴. *원래(遠來)-멀리서 왔다. *응(應)-꼭…할 것이다. *유의(有意)-의도가 있다. 구실이 있다. 핑계가 있다. 마음이 있다. *응유의(應有意)-이것도 무슨 인연이겠지. *지여원래응유의(知汝遠來應有意)-그대가 멀리서 찾아온 것은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신이 멀리서 찾아온 기분을 잘 안다. *호(好)-좋다. *여(汝)-자기 형제의 손인 한상(韓湘)을 가리킴. *수(收)-거두어들이다. 고치다. *오골(吾骨)-나의 유골. *장강(瘴江)-(남방 열병의)독기가 서린 강. *호수오골장강변(好收吾骨瘴江邊)-좋다. 나의 유골은 남방의 장강 가에서 거두자.

 

감상

아침에 한 통의 상주문을 조정에 바쳤더니 그날 저녁에 8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좌천되었다. 성천자를 위하여 폐해를 없애려고 했던 일이므로 쇠한 몸에 악착같이 살지 않고 여생에 미련은 없다. 진령산맥에 구름이 가로로 걸쳐있어 장안에 있는 내 집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남전관은 눈에 싸여서 말을 달릴 수도 없구나. 네가 멀리서 찾아온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유골을 장강 가에서 주워 모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시는 한유 52세 때에 가족과 함께 장안에서 추방당해서 남전관에 이르기까지 동행한 형제의 손자인 상(湘)에게 자신의 신념이면서 유언이기도 한 것이다.

제 1,2 구에서 ‘조주(朝奏)’‘석폄(夕貶)’으로 상주에 대한 황제의 격노를 나타내고, 3, 4구에서는 천자에 대한 충성심을 읊으며, 5, 6구에서는 눈앞의 정경 곧 불안한 작자의 마음을 그리고 7, 8구는 유언을 나타낸다. 그는 황제 헌종(憲宗)이 죽자 다시 서울로 소환되었다.

 

작자

한유(韓愈)(768-824)

당나라 중당기의 시인이고 문장가이며 사상가이다.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라 했다. 남양(南陽)(하남성/河南省) 사람이다. 3세 때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형수에게서 자라났다. 792년 25세에 진사에 급제했는데, 35세에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고, 지방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으나, 수도의 행정장관을 탄핵하여 양산현령(陽山縣令)(광동성/廣東省)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되어 주로 국자감에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819년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광동성)로 좌천되었으나, 이듬해 헌종이 죽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그의 시는 구법이나 수사 등에서 난해한 것이 많이 나타나고, 특히 고시(古詩)를 많이 지었다. 그의 산문의 공적으로 산문의 문체개혁을 들 수 있다. 종래 대구(對句) 중심의 변려문에 반대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달의(達意)가 되는 문체를 만들어 ‘고문(古文)’이라 일컫고,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발전시켜 중국 산문문체의 모범이 되었다. 시에 있어 서정적 테마에 한정하지 않고 논설을 전개하거나 사실을 기술하는 등 지적인 흥미를 정련된 표현으로 나타내기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때로는 산문적이며 난해하다는 평도 받았으나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宋)나라 시에 끼친 영향이 크다. 사상면에서는 유가사상을 존중하고 불교․도교를 배격하였으며, 도통(道統)을 중히 여겨 문자 해석보다 사상에 중심을 두었다. 그래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그의 ‘논불골표(論佛骨表불)=불골을 논하는 표’는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 실려있다. 저서로 이고와의 공저 <논어필해(論語筆解)> 2권 <창려선생집(昌藜先生集)> 40권 <외집(外集)> 10권 <유문(遺文)> 1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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