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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4,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야기 (3/12)

간천(澗泉) naganchun 2024. 5. 15. 08:23

 

4,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야기 (3/12)

 

 

3,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 Zurich)으로

 

 

1895년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의 수험에서 총점이 합격점에 미달하여 입학에 실패하였다. 그런데 동교 교장은 아인슈타인의 수학과 물리 점수가 최고였기 때문에 아라우Aarau의 김나지움에 다니는 것 (대학입학에 필요한 중등교육의 제 지식을 습득할 것)을 조건으로 이듬해의 입학자격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1895년과 96년에 동교에 통학했다.

 

아라우의 학교의 교풍은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고 또 이 학교는 시청각교육에 힘을 경주하고 있었다.

어느 맑은 날 낮 시간에 아인슈타인은 학교의 뒤에 있는 언덕에서 누어서 하늘을 처다 보던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자신이 빛의 속도로 빛을 쫓는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잠이 깨자 곧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이것이 후의 상대성이론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교사인 요스토 윈텔라( Jost Winteler)의 집에 살았는데 그의 딸 마리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 18961월 부친의 허가 하에 독일제국 병역의무를 피하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은 독일시민권을 버렸다.(그 후 스위스국적을 취득하기까지는 무국적이었다)

18969월 마두라시험(Matura)(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등교육수료시험)을 아인슈타인은 좋은 성적으로 특히 수학과 물리는 6단계평가의 최고인 6으로 무사통과하였다.

 

10월 취리히연방공과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동 대학의 수학, 물리학의 교원자격을 취득하는 4년 과정의 학생이 된 것이다. 동학은 자유로운 교풍으로 여러 사람의 학우를 얻었다. 연애 상대였던 윈텔라의 딸 마네는 아인슈타인보다 1살이 연상으로 이미 교원자격을 얻어서 교사로 착임하기 위하여 스위스의 오르스베르크로 이사해버렸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동대학에서 미레바 마리치라는 여학생을 만난다.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은 당시로서는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했던 소수의 대학의 하나로서 미레바는 아인슈타인이 속하는 과정의 6명 중애서 유일한 한 사람의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친구였던 두 사람은 수년이 지나는 사이에 연애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점점 열중하던 물리의 문헌을 함께 읽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의 강의에는 자주 출석하지 않고 자신의 흥미가 있는 분야에만 열중하여 물리 시험은 최저 <1>, 전기기술에서는 우수한 <6>의 성적이었다. 대학시대는 화학실험 중에 폭발하는 사고를 일으켜 학교를 패닉 상태로 빠지게 한 일도 있었다. 그는 교사에게는 반항적이고 수업에 잘 빠졌다.

졸업하는 해인 1900년 아인슈타인은 수학, 물리의 교원자격시험에 무사히 합격하였다. 아인슈타인은 7월에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을 졸업했는데 대학의 물리학부장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웨버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대학의 조수는 되지 못하였다. 보험외교원, 임시대리교원이나 가정교사로서 수입을 내면서 논문집필에 힘썼다.

 

1901년 스위스국적을 취득하였다. 스위스도 병역의무를 해야 했는데 아인슈타인은 편평족 및 정맥류 진단이 나와서 면제되었다. 일반인들에게는 1987년에 젊은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연구되어 처음으로 밝혀진 일인데 이 무렵 미레바는 아인슈타인의 아기를 임신하여 그녀의 양친이 있는 곳에서 체재했는데 1902년 초두에 딸을 낳았다. 두 사람이 나눈 편지에는 그 아이는 <리젤(Lieserl)>이라고 가명으로 불렀는데 출산 후 미레바는 아기를 데리지 않고 스위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