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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24,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이야기(5/5)

간천(澗泉) naganchun 2024. 11. 22. 02:55

24,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이야기(5/5)

=전자파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예언한 전자기학의 조=

 

 

 

6, 학문적 업적과 말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1864년에 왕립협회에서 전자기장을 와류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전자기장 모델인 <맥스웰 방정식>을 발표했다. 같은 1864년과 1870년에는 맥스웰-베티의 상호작용 정리와 관련된 논문도 발표했다.

 

18654, 논문 집필 등의 과중한 업무로 인해 맥스웰은 킹스 칼리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해 가을, 고향 미들비로 돌아갔고, 1867년 봄부터 여름까지 아내의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868년에는 논문에서 <전자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전기와 자기의 상관성을 언급했다. 1871년에는 자신의 저서에서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Julius Emmanuel Clausius, 1822-1888, 독일의 이론물리학자)가 제안한 열역학 제2법칙에 의문을 제기하며 <맥스웰의 악마>라는 사고 실험을 제시했다.

 

1865년 이후 스코틀랜드의 자택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맥스웰은, 187138일 케임브리지 대학의 요청을 받아 실험물리학 초대 교수가 되었다. 그는 제7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가 설립한 캐번디시 연구소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1874616일 연구소가 개소하자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맥스웰은 데번셔 공작으로부터 친족인 헨리 캐번디시의 미발표 연구 자료를 넘겨받아, 이를 재현하며 1879년에 논문집을 발행했다.

 

1877년에는 아담스 상의 심사위원이 되어, 그의 동창이었던 라우스가 이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1879년 여름, 고향 미들비를 방문했을 때 2년 전부터 앓아온 복부 암이 악화되었고, 케임브리지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그해 115일 사망했다.

 

7, 평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20년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업적은 아이작 뉴턴보다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에게 더 많이 의지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