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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위대한 여성

제13위, 유럽 최강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간천(澗泉) naganchun 2023. 5. 16. 03:29

제13위, 유럽 최강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독어: Maria Theresia, 1717513- 17801129=하브스브르크제국 소위 오스트리아제국 군주

 

*하브스브르크조독어Habsburg-Haus=스위스 북부의 바덴지방을 발상지로 하는 독일 남부의 아레망인 귀족으로서 대대로 신성로마 황제를 배출한 가계이다.)

 

오스트리아의 여제이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어머니이다.

하브스브르크가의 당주인 칼6세가 죽자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대공의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여계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이웃 나라인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트리히대왕과 프랑스왕 루이15세에 의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에 슈레젠(독어; Schlesien=중부 유럽의 오데르강 상 중류유역의 지명으로 현재는 태반이 폴란드영이고 일부는 체코영이다.)의 토지를 빼앗겼지만 그녀의 즉위는 국제적으로 인정되어서 그녀 자신은 다시 헝가리왕, 보헤미아왕을 겸임하고 남편은 신성로마황제의 지위에 취임하게 되었다.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대왕에게 빼앗긴 슈레젠을 도로 찾기 위하여 원수인 프랑스 부르봉조와 동맹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동맹은 후에 외교혁명이라고 불리고 후에 프랑스 루이16세에게 그녀의 딸 앙뜨와 네트를 시집보내게 되었다.

프로이센과의 사이에 일어난 7년 전쟁은 영국의 개입을 촉진시켜 국제적인 전쟁이 되었지만 결국 슈레젠은 도로 찾지 못하였지만 오스트리아의 국제적인 지위는 올라가고 나폴레옹전쟁 후의 오스트리아 주도의 국제관계인 빈체제 등의 기초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 프랑스 슈테판(독어;Franz Stephan von Lothringen, 1708128-1765818)과의 사이에 생애 16명의 자녀를 낳고 그 막내가 마리 앙트와네트이다. 프랑스는 테레지아의 첫사랑이 상대였다고 하고 프랑스 사후 테레지아는 호화로운 의상을 버리고 자신은 종생 상복을 입고 지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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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추가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1740년 칼 6세가 서거하자 바이에른, 프로이센, 삭센의 독일 제후국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영토를 분할하려고 쳐들어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의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서거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23세였다.

남편 프랑스 슈테판과의 사이에는 이미 아이가 3명 있었다. 그 때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테레지아는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가 없고 의지할 이는 남편인데 남편은 군사적인 재능이 없으며 거듭되는 전쟁으로 전쟁 비용도 원군도 얻지 못하는 처지라서 정신들은 이 여자 상속인에 대하여 싸늘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테레지아는 굴하지 않고 1741년 헝가리를 쳐서 부왕의 위를 계승한 왕이 되고 의회에서 헝가리 사수의 뜻을 확실히 해서 필사의 구원을 호소했다. 그런 그녀의 자세에 감동하여 지금까지 반항적 입장에 섰던 헝가리 귀족들이 그녀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게 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자금과 병력을 얻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천부적인 정치력과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또 프로이센에 대항하고 있는 영국과 네델란드의 지원을 얻어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후국에 대하여 반격을 가하게 되었다. 

 

1743년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여왕이 되고, 1745년에는 남편 프랑스 슈테판이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황제(프랑스 1세 슈테판)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위대한 여제로서 국외에서도 인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