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의 고향 스코피예는 19세기 중에 유수한 수공예품의 중심지가 되어서 물자유통의 성한 도시였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유복한 상인으로서 생계를 세우고 있었고 어머니는 주부로 커다란 정원이 있는 저택에서 살았다. 마더 테레사는 오빠 라자(Lazar), 언니 아가(Aga) 다음 셋 째 번 막내로 태어났다. 양친은 마케도니아 지방에 사는 가톨릭 교도였다.
어린 시절
테레사 일가는 가톨릭교도로서 거의 매일 저녁 예배에 참가했고 이웃에게도 친절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여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We were a united and very happy family.> 그러나 테레사가 8세 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하여 일을 하였다.
어머니는 테레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테레사와 언니 아가는 교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전도나 성인전기를 읽기를 좋아하였다. 오빠가 말하는 바에는 어머니나 누이들은 집에 있기보다 협회에 있을 때가 길었다고 한다. 테레사는 어릴 때부터 가톨릭이 생활의 중핵이고 교회활동에 관계하고 있었다. 이러는 가운데 12세 때에 테레사는 인도에서의 전도 활동을 알고 스스로 전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칼카타의 수도녀
1928년 18세 때에 수도녀가 되려고 결심하고 성좌의 허가를 받아 고향인 스코피에를 떠나서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가서 롤레토수도녀회(Sisters of Loretto)에 가입하였다. 롤레토수도녀회는 자녀교육을 행하는 수도회였다.
실제로 테레사의 아일랜드 체재는 가톨릭 교의를 공부하고 고등교육을 몸에 익히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인 중계지여서 1년도 되지 않아 1928년 12월에는 롤레토의 전도사 멤버로서 인도에 파견되게 되었다. 그녀는 고향인 스코피예를 떠나기 전부터 인도에서의 전도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929년 1월 6일 인도의 칼카타(Calcutta)에 도착하여 성 마리아학원(St. Mary's high school) 교사가 되었다.
1929년부터 1948년까지 테레사는 칼카타의 성마리아학원에서 지리와 가톨릭 교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리가 좋았고 또 유머러스한 그녀의 수업은 학원 여학생들 사이에 대단히 인기가 좋았던 것 같다. 1944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결국 1929년~ 1948년의 18년간을 교원으로서 지리와 가톨릭 교의를 여학생에게 가르쳤다
그 사이에 1931년 처음 서원을 하여 시스터 마리 테레사(Sister Mary Teresa)라 불리고 1937년 5월 최종 서원으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라는 종교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하느님의 계시와 독립
상류계급 자녀의 교육에 당하면서 테레사의 눈에는 언제나 칼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습이 비쳐졌다.
테레사 자신의 말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 독립 전해인 1946년 9월 10일 다지린(Darjeeling)으로 가는 열차를 탔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라--.> 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한다.
1년도 되지 않아서 테레사는 수도원을 떠나서 활동할 수 있는 허가를 받으려 했으나 바티칸 수도원 관할청 등 가톨릭교회의 상층부에서는 신중히 평가하려고 바로 그녀의 활동에 대해서 인가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테레사는 자신이 믿는 길을 나가리라 하고 결심하고 있었다.
1948년 간신히 교황 비우스12세한테서의 수도원 외 거주의 특별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테레사는 수도원을 떠나 독립한 수녀가 되어서 단기간 의료 미션(Medical Mission Sisters in Patna)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칼카타에 돌아와서 칼카타의 슬럼가 안에 들어가서 일시적인 숙사 <가난한 자의 작은 시스터>(Little Sisters of the Poor)를 세웠다. 또 야외학교(open-air school)를 집 없는 어린이들에게 개방했다. 그녀는 인도 여성이 입는 질소한 사리를 입고 먼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서 가두에서 무료로 수업을 행하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에게 성마리아학원 시대의 제자들이 지원봉사자로서 모이기 시작하였다. 교회나 지역 인사들에게서의 기부가 모여졌다.
「하느님 사랑의 선교자회」의 창립
1950년에 수도회 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선교자회>이다. 테레사에 의하면 동회의 목적은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지체장애자, 병자 등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사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이었다. 테레사는 수도회의 리더로서 <마더>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도정부의 협력으로 힌두교의 버려진 사원을 양도받은 테레사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집>이라는 호스피스를 개설하였다. 이후 호스피스나 아동양호시설을 개설해 갔다. 활동 초기에는 지역주민들은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라고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간호를 받는 대상자의 종교를 존중하는 자세를 일관하였다. 죽은 자에 대한 의식은 그 사람의 종교에 따랐다.
간호하는 대상자의 상태나 종파를 불문하고 테레사 등의 활동은 세계에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원조를 받게 되었다. 1960년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선교자회>의 활동은 전 인도에 파급되었다. 다시 1965년 이후 교황 바오로6세의 허가로 인도 국외에서의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도 이외에서 처음으로 선교녀가 파견된 곳은 남미 베네주엘라(Venezuela)였다. 이후 수도회는 전 세계 규모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활약하게 되었다.
세계의 마더 테레사
테레사의 활동은 가톨릭교회 전체에 자극을 주어서 <하느님의 사랑의 선교자수도사회>(1963년)나 <하느님의 사랑의 선교자신도회> 등이 차례차례로 설립되었다. 1969년 미국인 말콤 무게리제(Malcolm Muggeridge)가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훌륭한 일을 하느님을 위하여>(Something Beautiful for God) 및 동명의 서적에 의하여 테레사의 활동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을 취재하는 가운데 무게리제는 테레사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1971년, 교황 바오로6세는 스스로가 제정한 훈장 <교황 요한23세평화상> 최초의 수훈자로 테레사를 선정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많은 상이 테레사에게 주어졌다. 케네디상(1971년), 시바이처국제상(1975년), 미합중국대통령자유훈장(1985년), 미상원의회금상(Congressional Gold Metal, 1994년), 미합중국명예시민(1996년), 이에 더해서 다수의 대학은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미합중국명예시민으로서는 5명 째였다. 미국동맹국 정치가나 군인 외로는 처음이었다.
이들 많은 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1979년에 받은 노벨평화상일 것이다. 테레사는 수상식에 즈음하여 특별한 정장도 하지 않고 일상처럼 흰 무명 사리와 가죽 제 산달을 신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상금은 19만 2천 달러 전부를 칼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수상식상에서 <나를 위한 만찬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비용은 아무쪼록 가난한 사름들을 위하여 써주세요.>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상금을 받은 때 <이 돈으로 몇 개의 빵을 살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터뷰 중에 <세계 평화를 위하여 우리들은 어떤 일을 해야 좋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테레사는 <집에 돌아가서 가족을 사랑해주세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1982년에는 테레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의 고관을 만나서 무력충돌을 일시 중지시키고 전화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베이루트 병원의 환자들을 구출하였다.
만년과 죽음
1983년 고령인 테레사는 요한 바오로2세와 회견하기 위하여 방문한 로마에서 심장발작을 당하여 1991년에는 베스메카를 달았다. 이해 좋지 않은 건강상태로 고향인 알바니아에 최초의 지부를 설립하고 있다. 이것은 테레사의 염원이었다. 동년 테레사는 건강상태를 이유로 총장을 사임하고자 전회원에 의한 무기명투표가 행해졌는데, 결국 찬성표를 던진 것은 테레사 본인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반대였다. 그래서 그녀는 총장에 유임할 것을 동의하였다.
1997년 4월 테레사는 넘어져서 목뼈를 다치고 8월에는 마라리아에 걸렸다. 이미 심장상태가 악화된 때문에 총장직은 1997년 3월에 물러났다. 1997년 9월 5일 세계가 보는 가운데에서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테레사가 죽었을 때 <하느님의 사랑의 선교자회> 멤버는 4천명을 헤아렸다. 123개국 610개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활동내용은 호스피스, HIV(인간면역부전 바이러스감염/human immunodeficiency virus)환자를 위한 집,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집(평화촌), 취사시설, 아동양호시설, 학교 등이다.
종파를 불문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일한 테레사의 장례는 인도정부에 의하여 국장으로 성대히 치러졌다. 인도의 대통령이나 수상 이외로 국장으로 보낸 사람은 그녀와 2011년 4월에 사거한 사디아 사이 바바(Sathya Sai Baba, 1926년 11월 23일~2011년 4월 24일=인도의 영적 지도자)뿐이다. 그녀의 죽음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인도 사람들은 슬퍼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도 그녀의 위대한 일들을 생각하여 추도하였다.
그 장례의식에는 각종파의 대표가 참가하고 종교의 틀을 넘어서 존경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일이 되었다.
종교적 명예
1997년 테레사 사후 서둘러서 열복, 열성조사가 시작되었다. 통상은 사후 5년이 경과되지 않으면 시작할 수가 없는 규정이지만 테레사의 경우는 생전부터 성녀의 칭찬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업적을 극히 높이 평가하고 있던 요한 바오로2세가 앞당겨서 강력히 요구한 때문에 예외적으로 5년을 기다리지 않고 시작된 것이다. 2003년 10월 19일 요한 바오로2세는 테레사를 열복하고 복자임을 선언하였다. 통상은 본인이 사후 복자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적어도 수십 년의 심사가 필요하다고 하는 형상을 생각하면 시후 6년으로 열복이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