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이야기(3)
== 「케플러의 법칙」 발견으로 천문학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6, 티코와의 해후와 연구
이 시기에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 덴마크의 천문학자로, 천문학 기구를 개발하고 별의 위치를 측정하고 고정하는 데 기여하여 미래의 발견을 위한 길을 닦았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 가능한 가장 정확한 그의 관측에는 태양계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와 777개 이상의 고정된 별의 정확한 위치가 포함되었다.)의 초대를 받았다.
티코는 정확하고 방대한 관측을 바탕으로 태양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려고 노력했고, 그는 좋은 조수를 원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똑똑한 것으로 밝혀졌다. 티코는 케플러에게 모든 자료를 보여 주면 그 자료들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보여주기를 꺼렸다.
케플러는 그의 친구에게 말하기를, "티코는 나에게 그의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를 결코 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오늘 한 행성의 원일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 날에는 다른 행성의 교차점에 대해 말하고, 식사 시간에 대화할 때 가끔 나에게 말한다. 그들은 매우 인색하고 그들이 관찰한 것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불평하고 있다. (16세기 문화대혁명, 야마모토 요시타카, 쇼보 미스즈, 2007년 4월, p.670)
또한 두 사람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다. 엄격하고 정직하고 가난한 케플러와 연회를 좋아하는 부자 티코는 자주 다투고 화해했다고 한다. 티코는 당대의 대표적인 관찰자 중 한 명이고, 케플러는 당대의 대표적인 이론가이며, 이는 그들 사이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출처=https://www.s-yamaga.jp/nanimono/sonota/kepler.htm
1601년에 티코는 사망했는데, 케플러가 그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반 후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 티코는 케플러에게 지난 16년 동안 관찰한 자료를 정리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렇듯 관측자 티코의 정확하고 방대한 관측 자료는 이론가 케플러의 손에 의해 정리되고 분석되었으며, 이는 케플러의 법칙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태양중심설(지동설)을 강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위키페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