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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일본과의 왕래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23. 2. 17. 10:02

100년 전 일본과의 왕래 이야기

 

 

20세기 초두의 한일 간 내왕

 

1905년 일본은 산뇨기선(山陽汽船)의 잇기마루(壹岐丸)라는 기선을 띄워서 격일제로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를 내왕했다. 일제가 대륙 진출을 위하여 우선하여 개척한 길이었다. 소위 부관연락선(관부연락선)이다.

또한 1922년에 아마가사키기선(尼崎汽船)에서 기미가요마루(君代丸)라는 배를 띄워서 주 1회 제주도와 오사카(大阪) 사이를 내왕하게 되어서 일제가 필요로 한 인력을 충당시키는데 일조를 했으며 또한 제주도민은 새로운 세계에서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으로 다수 도항하였다.

이 이야기는 90년에서 100년 전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재일동포의 회고담에서

 

이 기사는 고선휘(高鮮徽)라는 사회학자가 어느 재일동포와의 대담에서 일본에서의 생활을 직접 취록한 이야기 중에서 교통편에 관해서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이에 게재한다.

 

(내가 기미가요마루에 탄 것은) 마을에서 기미가요마루가 보이면 짐을 챙기고 40분 정도를 걸어서 이웃 마을까지 가서 탔었다. (기미가요마루는) 1회를 주기로 오는데, 바람의 형편에 따라 섬의 항구를 도는 순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뀌는 일도 있었어. 기착하는 곳은 대체로 서귀포, 대정, 한림, 제주, 조천이었다고 생각한다.

 

배에는 1, 2, 3등 선실이 있어서 싼 것은 3등이므로 3등을 탔다. 선실에 들어가니 넓은 방에 목침이 열을 지어 놓여 있었다. 밑바닥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카펫 같은 천을 깔았다. 그 배는 원래는 사람을 싣기 위한 배가 아니라, 화물 운반선이었는데, 그것보다도 화물을 많이 실을 수 있고 빠른 배를 샀기 때문에 필요 없어진 것을 재활용하여 사람을 운반하는데 썼던 셈이다.

 

선실에 들어가도 사람은 그리 많이 타지 않았다. 구석에 2, 3명이 누워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탄 사람인지 모른다.

다시 배 밑으로 돌아가자.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누워있는 셈인데. 식사 때가 되면 선원이 내려와서 고동을 불어 알리는데, “식사요!”하고, 모두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밥이 커다란 양푼에 담겨져 들어와서 틈틈이 놓인다. 몇 사람씩이던가. 그 양푼에서 퍼서 먹는 것이다. 된장국은 큰 주전자에 담아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다. 배에서 먹는 밥은 참 맛이 있었어. 확실히 제주에서 오사카까지 3일 낮, 3일 밤이었던가, 4일 낮, 3일 밤이었던가 생각된다. 날씨가 좋으면 빨리 도착할 터인데, 배는 날씨가 거칠어지면 떠밀리어서 더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목적지까지 싣고 가서 사람을 내려놓는 것이 상책이지. 한 끼라도 여분으로 내게 되는 것은 경비가 걸리니까. 밥을 먹고 나면, 한참 있다가 선원이 내려와서 지금 같으면 가라오케 서비스 타임인 거야. 노래를 부르는데, 사람이 모이면 거기에는 그런 것을 잘하는 명인들이 있는 법이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떠들썩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바다는 거칠어진다. 선원들은 갑판으로 뛰어가서 대비한다. 여러분 편안히 잠자요. 모두는 앉아있는데, 배가 흔들리므로 가만히 앉지 못하고 같이 흔들리는 것이다. 크게 흔들리면 모두 돌돌 굴러서 한 쪽으로 몰리고, 다시 흔들리면 반대쪽으로 구르곤 하는 것이다. 붙잡을 곳이 하나도 없으니까 넓은 바닥을 구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멀미를 하여서 토해내기도 한다. 배에서는 한 사람에 하나씩 토할 그릇으로 알루미늄 그릇이 있어서 거기에 토해낸다. 배 멀미, 이것은 괴로운 거야. 3일이나 이렇게 흔들리면 신에게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지.

이 이야기는 만들어 낸 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내가 직접 본 일은 아니지만, 여자들이 살려주세요. 하느님이여 살려주세요.” 하고 말한다. “나는 나쁜 짓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쁜 짓은 한 번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살려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외간 남자와 외도를 한 것은 한 번밖에 없습니다.” 하고 그러니까 거기서는 모두 참말을 말한다는 거지. 모두 자백을 한다는 거지.

 

선원들은 놀리노라고 아주머니, 모두 토해내는 것이 좋아요. 마음에 걸릴만한 일은 모두 토해버리는 것이 시원해지는 길이지요. 다른 사람도 모두 그러니까요.” 하고 말하는 거야. 괴로우니까 가슴이 시원하도록 토해버리라고, 그것이 2 , 3 일이나 계속되면 오사카에 닿으면 모두 맥이 빠져서는...

 

이제 막 오사카가 보이게 되면 모두 내릴 준비를 하게 된다. 거기서 선원들에게 신세를 졌노라고 돈을 모으는데, 10 전도 있었어. 선임은 확실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도쿄의 전차 차표가 7, 골덴바트라는 담배가 7, 두부 한 모가 3전 하는 곳과 5전 하는 곳이 있었던 시대의 물가 수준이니까, 250전인가 350전은 간단히는 만들 수 없는 돈이었다.

 

제주와 오사카 간은 가장 돈이 되는 항로로서 3개의 회사 정도가 경쟁한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제주 사람이 왕래가 많았던 거지. 배에는 제주 각지에서 탄 사람들이 있어서 나의 가슴에 단 이름과 행선지를 적은 것을 보고, 도쿄까지 데려다 준다고 몇 사람이 말했지만, 오사카 항구에 배가 닿으니까 나를 잊어버린 듯이 자신의 길을 서둘러 마중 나온 사람과 함께 돌아갔다.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차장에게 물으면서 오사카에 살고 있던 종형제를 찾아갔다.

그리고 도쿄까지 오는데 도시락 하나, 차 한 잔도 사지 않았다. 돈이 없었던 것이다. 도시락이 15전인가 20전 했는데 말이지, 먹지고 않고 마시지도 않아서 도쿄의 형님 네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었다.(출처=고선휘 저 <재일한국인의 타향살이>에서)

 

제주도 연구자 마스다이치지의 아들의 회고담에서

 

다음은 1930년대의 일로 제주도연구에 일인자였던 일본인 학자 마스다 이치지(桝田一二)의 아들 마스다 요시로((桝田淑郞-지바대학 교수)의 아버지를 회고하는 글에서 취한 일본에서 제주도 내왕한 기록이다.

 

섬으로 건너가는 수단으로서 1933년 여름에는 목포(木浦)를 경유하여 제주도에 들어갔으나 귀도는 겨우 10 톤 어선에 편승하여 여수(麗水)로 건너가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경유하는 코스를 택하고 있다.

193481일에는 제주도민이 오사카에 매년 수 만 명이나 출가하게 되어서 오사카와 제주도 사이에 직접 항로가 개설되어 있던 아마가사키(尼崎) 기선의 제2 기미가요마루(君代丸=919)에 승선하였다.

선객 565명 중 일본인은 아버지를 포함하여 2, 기타 이동경찰관이 3명이라는 인원 구성이었다고 한다.

이 배는 섬 주위에 15개소의 기항지가 있어서 그곳을 전부 돌아서 오사카로 오는 코스였다든지, 오사카에서 제주도의 제일 기항지까지 3주야 걸렸다고 적고 있다.

아버지가 이런 배를 택한 것은 선임이 싸다는(3식을 붙여서 1등이 12, 2등이 6) 것 때문만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사수단과 시간의 절약이었다는 것을 엿보아 알 수 있다. 학자로서의 진실함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출처=재일제주도민회의 <제주도> 8호에서)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을 통하여 전 세계가 일일권인 시대이다. 아침에 도쿄에 출장하여 오사카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로 돌아오는 일들이 빈번한 시대가 되었으니 이 이야기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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