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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야기/일본 이야기

내가 본 침략전쟁

간천(澗泉) naganchun 2014. 3. 8. 15:33

 

내가 본 침략전쟁(2일의 일기)

 

 

 

육군 위생병으로 체험을 가진 사람이 8월 18일 <신문 적기(赤旗)>에서 침략전쟁의 실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커다란 참화를 끼친 일본의 침략전쟁.

전후 68년이 지난 지금도 아베(安倍) 정권은 침략전쟁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전쟁에 참가한 전 일본군의 가해를 중심으로 <미해결의 침략전쟁>을 생각해본다.

--모토요시마키(本吉眞希) 기자.=(일본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까하타(赤旗>기자-)

 

<중국에서의 전쟁체험을 말하는 것은 괴롭지만 살아있는 나의 사명입니다.> 91세의 전 일본군 병사 마쓰모토 마사요시<(松本栄好)=가나가와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1944년 2월경이었습니다. 육군의 가다메(固) 병단(독립여단) 제7대대의 위생병으로 중국 산서성 맹현(孟縣)으로 전속된 것입니다. 거기서 군의(軍醫)가 월 1회 행하는 <위안부(慰安婦)>들의 성병검사를 돕는 것도 나의 일이었습니다.

가다메 병단은 7개의 대대가 있어서 제7대대의 본부만으로 조선인 위안부 6, 7명이 연행되고 있었습니다.

전선의 병사들이 중국의 마을을 급습할 때 처음으로 소리 지르는 것은 <좋은 색씨가 없는가?>였습니다.

반년 후 내가 대대본부에서 30-40킬로 북쪽 상사진(上社鎭)이라는 마을 밖의 분견대에 파견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마을을 돌면서 가축이나 돼지나 닭을 훔쳤습니다.

한 번은 늦게 도망치던 여성 7, 8명을 붙잡아 병사에 가두고 <위안부>로 하였습니다. 1주간 정도로 대장은 여성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 대신에 촌장을 위협하여 다른 여성 2명을 병사에 들여서 종전까지 감금했습니다.

 

팔로군(중국공산당군) 정보를 얻기 위하여 중국인을 붙잡고서는 고문하였습니다. 최후에는 자신의 구덩이를 파도록 하여 그 앞에 앉히고(목을 치는) 칼이 잘 드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하는 목 치기였습니다. 지뢰탐지기라 해서 선두에 서서 걷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한 일은 <현지조달>이라는 이름의 강도, 살인, 강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 하러 들어간 집 문에 장치해둔 폭탄으로 죽은 상등병을 <명예의 전사>라 하여 야쓰구니신사에 합사하였습니다.

 

근원에 천황제가

모랄을 상실한 일본인을 만들어내고 침략전쟁에 나가게 한 근원은 절대주의적인 천황제라고 생각합니다. 전전의 대일본제국헌법이나 교육칙어에 있는 것은 <신민(臣民)>이었습니다.

<국민>이라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민당 개헌초안의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원수이고>라는 기술은 천황은 있고 국민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아베수상은 <증거가 없다.>고 하는 <강제연행>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수상은 <긍지 높은 일본을 되찾는다.>고 하지만 진실을 감추고 있어서야 속임수의 긍지입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왜 내가 증언 활동을 계속하는가? 그것은 평화헌법을 내걸고 있는 일본의 장래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2013년 8월 18일 <신문적기> 일요판 18쪽 <일요 와이드-내가 본 침략전쟁>에서 인용

 

  이 증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파진 구덩이 앞에 앉히고 일본도로 시험 삼아 목을 치는 만행은 다른 많은 부대에 소속했던 병사들의 증언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그 수는 10건 20건만이 아닙니다. 이런 행위는 적과의 전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분명한 범죄입니다. 패전 직후에는 이들 범죄 때문에 B, C급 전범이라 하여 처형된 병사도 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종전시의 혼란에 편승하여 모르는 척하고 귀국해서는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평화로운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잘 사는 사람도 많다고 듣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런 사실(史實)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자료에서 전편 번역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