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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기/제갈공명 이야기

제18화  제갈공명전설(諸葛孔明傳説)

간천(澗泉) naganchun 2020. 7. 23. 15:38

제18화  제갈공명전설(諸葛孔明傳説)

 

공명의 역사상 본질은 <정사> <제갈량전(諸葛亮傳)> 의 평 부분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갈량(諸葛亮)은 승상이 되자 민중을 위무하고 가야할 길을 보이고 관직을 적게 하고 법률을 범하여 직무에 태만한 자는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벌하였다.

죄를 반성하는 정을 보이는 자는 중죄인이라도 반드시 사하여 주었는데 핑계를 대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가벼운 죄이더라도 반드시 사형하였다.

모든 일에 정통하고 사안은 그 근원을 규명하여 명분과 사실이 일치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하여

거짓 가장은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국내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 원망하는 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배려가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의 본질을 숙지하고 있는 좋은 인재이고 관중(管仲)(춘추시대의 명재상)이나 소하(蕭何)(전한의 명재상) 같은 명재상과 같은 반열에 놓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매년 군세를 움직이면서도 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임기응변의 기략이 그에게는 능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일까.>(제갈량전)

공명은 초일류의 관리본부장이었고 대단히 공부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군사에 대해서도 꽤 숙달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승부에 대한 감각이라든지 기책을 쓰는 법 등은 서툴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을 체현시킨 정치가라 할 수 있다. *

 

제갈공명 평가의 변천상

 

<정사삼국지> 편찬(서기 200년대) 1000여년 사이의 제갈공명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삼국지연의(서기1300년대)의 성립사>를 통하여 보기로 한다.

 

1, <정사삼국지>에서

 

유비를 뒷받침한 제갈량은 <극히 지혜롭다>고 일컬어진 군사이다. 이야기 속의 공명은 군사. 참모라는 틀을 넘어서 아마도 신선. 마술사적인 활약마저 보여주는 초능력자로 그려져 있다.

<연의> 전편을 통하여 유비(玄德)와 제갈량(孔明)만이 성보다 자()로 부르는 일이 많고 주인공다운 시점마저 주어진다. 또 관우(關羽)<운장(雲長=)> <관공(關公)>이라 부름으로써 휘()를 피하는 경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의 제갈량은 도중에서 유비진영에 참가한 이후 연의에서처럼 신 같은 활략을 보이는 일은 없다. <적벽(赤壁)의 싸움>에서도 외교면 이외의 활략은 거의 볼 수 없다.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諡號)가 주어져서 삼국지(三國志) 성립 이전의 위나라, 오나라의 사서(史書)에서도 크게 평가되고 있었음에도 무관하게 <정사>에서의 진수(陳壽)의 제갈량평은 제약된 조건 아래에서 최대한 정치능력을 발휘한 유능한 관리이고 <아마도 해마다 대군을 동원하면서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생각하건대 임기응변의 전술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 것처럼 그의 군사적 재능은 의문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수의 평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진(東晉) 시대 이후에 촉한(蜀漢) 정통론(正統論)이 제기되자 유학자의 이상국가의 통일을 목표로 싸운 제갈량의 평가는 올라갔다.

 

2, 군사 권위로서의 공명

 

정사에서 진수의 평가에 반해서 남북조에서 수(). ()에 걸쳐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이 다시 상찬을 받게 되었다. 북주왕조(北周王朝)(556-582)의 기초를 구축한 우문태(宇文泰)는 제갈량의 군사로서의 재능을 높여서 부하에게 <()>이란 이름을 주고 또 <연의>에도 등장하는 <팔진지법(八陣之法)>이나 <목우(木牛), 유마(流馬)> 등은 공명이 발명한 것으로 말하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들어서 명군 태종(太宗=이세민(李世民)의 간신(諫臣)으로서 <정관정요(貞觀政要)로도 알려진 위징(魏徵)마저도 제갈량에 뒤진다고 평하였다. 그 군사(軍師)로서의 재능은 손자(孫子), 한신(韓信)이나 당나라 건국의 신하인 이정(李靖), 이적(李勣) 등 명장 10명에 나란히 연명하게 되었다. 관우(關羽)처럼 남송에서는 <위열무령인제왕(威烈武靈仁濟王)>으로 봉해지고 국가 수호신의 한 사람으로 헤아렸다.

다시 조정과는 달리 민간에서도 동시에 공명의 군략(軍略)을 찬양하여 신비화하는 데까지 나갔다.

 

3, 충신으로서의 공명

 

촉한정퉁론(蜀漢正統論)과 함께 충의의 사()로서의 제갈량의 평가도 나아진다. 유비는 죽음에 임하여 병상에서 제갈량에게 태자인 유선(劉禪)을 부탁하며 <나의 자식에게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바꾸어 맡아다오.>하고 유언했다고 정사에 있다. 그러나 그에 무관하게 유선을 주군으로서 받들고 위나라를 계속하여 공격한 것은 충의를 다하는 행위로서 상찬되었다. 두보(杜甫)가 제갈량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고 하였듯이 수당(隨唐) 시대에는 이미 충신 제갈량의 평가는 높았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새롭게 <성한(聖漢)의 충신>으로 재평가된 것은 촉한 정통론을 강조한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였다. 주희의 평가는 유장(劉璋)을 속이고 촉나라 땅을 빼앗은 일도 모두 유비의 책임으로 하고 공명을 <삼대 하(), (), ()> 이래 의()로서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한 단 한 사람의 인물>이라고 절찬하고 있다.(주자류어(朱子類語 136) 여기에는 화북(華北). 중원(中原) 지역을 금()이라는 이민족왕조에 빼앗겨 그 탈환을 국시로 한 남송이 놓인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원 회복을 위한 북벌 도중에 사거한 공명은 주희로서는 국가의 이상을 반영하는 영웅이었다.

 

4, 신선으로서의 공명

 

이처럼 군사. 도덕면에서의 높은 평가에 더해서 공명에게는 도교(道敎)의 선인(仙人) 다운 이미지가 첨가되었다.

기이하게도 삼국시대에 시작된 원시도교(천사도./天師道)는 육조(六朝) 시대 이후 발전하여 청렴하게 속세를 떠나 선인 도사의 이미지가 지식인에게 침투하였다. 젊어서 청경우독하는 생활을 보내었던 공명도 신선다운 색깔로 말하게 되었다. 뒤에 말하는 갈건(葛巾), 모선(毛扇)이라는 도사다운 의상이나 출신지인 낭야(琅琊)가 천사도(天師道)의 메카이고 시황제 시대의 서복(徐福)이나 손책(孫策)을 저주한 우길(于吉=후한 말기의 도사) 등 고대보다 많은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를 배출한 지방이라는 점도 제갈공명과 방사-도사-신선 이미지를 맺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평화(平話)>에서는 제갈공명이 등장할 때에는 확실히 <원래는 신선이다.>고 언명하고 마술사로서 취급되고 있다.

<연의>에서 공명은 <적벽의 싸움>에서 초인적인 활동을 한다. 본래 승리의 장본인인 주유(周瑜)를 완전히 조역 정도로 쫓아내고 그 군략적인 천재를 발휘할 뿐 아니라 <기문둔갑천서(奇門遁甲天書)>에 기초하여 칠성단에 기도함으로써 바람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마술사의 모습을 보인다. <바람을 빌린다(차동풍/借東風)>는 이야기는 이미 <평화>에서도 그려져 있고 기도하여 바람을 일으킨다는 마술사적인 공명상은 강담(講談) 중에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다시 <남만정벌>에서는 기계로 조작하는 맹수를 제작하고 모선(毛扇)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등 기술을 구사하여 맹획(孟獲)을 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모습도 보인다.

공명의 최후의 일이었던 제5차 북벌에서 적군에게 일부러 틈새를 주는 <공성(空城)의 계()>, 목우(木牛), 유마(流馬)라 하는 불가사의한 기기로 위나라 군대를 이끄는 사마의(司馬懿)를 희롱하였다. 다시 초능력자 최후의 마술은 성좌(星座)를 관찰하여 죽을 시기를 깨닫고 북두성에 기도해서 자신의 연명을 꾀하기도 한다. 이 기도는 위연(魏延)의 실수로 중단되어 연명은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반목하고 있던 위연과 공명의 관계를 이용하여 후에 위연이 난을 일으키는 복선으로 교묘하게 배려하고 있다. 다시 초인인 공명이 죽은 후에도 신통력을 발휘하였다. 공명의 죽음을 타서 공격해온 사마의(司馬懿)를 격퇴하는 병법을 남기고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리게 한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양의(陽儀)와 강유(姜維) 등이 사마의(司馬懿)를 추격한 데에 대한 찬사였다. 그런데 연의에서는 생전의 공명이 <나의 시신의 입에 쌀 일곱 알을 물리고 발아래 불을 밝히면 우리 장성(將星)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도교의식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는 데 대하여 목상(木像)을 써서 위나라 군대에 공명이 아직도 살아있는 듯이 보이게 하였다. 다시 생전에 위연의 반란을 예견하고 마대(馬岱)에게 비책을 알려주는 등 사후에까지 도교적인 신비성을 띤 초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 출처= www.t3.rim.or.jp/~miukun/koumei%20front1.htm -

미우라노부아키(三浦伸昭)제갈공명전

* 출처=ja.wikipedia.org 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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