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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58,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1790~1832) 이야기.(3/4)

간천(澗泉) naganchun 2025. 10. 15. 02:44

세계의 과학자

58,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1790~1832) 이야기.(3/4)

==13개국 국어를 이해하여 고대 이집트문자를 해독하였다.==

 

 

샹폴리옹과 그의 시대

 

샹폴리옹은 17세에 파리로 나가 연구에 몰두했다. 불과 1년 만에 콥트어(지금도 상나일 지방에서 쓰이는 고대 이집트어 후신)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독백하고, 콥트어를 데모틱 문자로 논문까지 썼다. 그러나 생활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고, 형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징병제를 실시하자 강제에 저항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때도 형이 탄원서를 올려 병역을 유예받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로제타 스톤 연구였다.

 

1809년 그는 그르노블로 돌아가 19세에 역사학 교수로 발탁되었다. 그는 역사 연구의 최고의 목적은 진리에 대한 충동이다라고 선언하며, 절대적 진리를 인정했을 뿐 나폴레옹주의적·부르봉주의적 진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신념은 나폴레옹 몰락, 왕정복고, 나폴레옹의 부활(백일천하)이라는 격변 속에서 번번이 좌절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진군할 때 그르노블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 신봉자였던 그의 형은 일부러 샹폴레옹으로 이름을 잘못 써서 황제의 눈에 들어 비서가 되었다. 동생 샹폴리옹도 그 자리에 있어 나폴레옹을 직접 만났는데, 그가 고대 이집트를 연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저서를 파리에서 인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일천하는 곧 막을 내렸다.

 

왕당파 군이 그르노블로 밀려오자, 샹폴리옹은 삼색기를 들고 성벽 위로 뛰어올라 저항 의지를 보였다. 포격이 시작되자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파괴될 것을 깨닫고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물과 모래를 운반해 혼자서 포성이 울리는 가운데 파피루스를 지켰다. 결국 반역자로 몰려 교수직을 빼앗기고 그르노블을 떠난 그는 본격적으로 히에로글리프 해독에 전념하게 되었다.

 

1822년 해독 성공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고, 1826년에는 파리 왕립박물관 관장에 임명되었으며, 1828년에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해 2년간 현지 연구를 이어갔다. 183040세에 프랑스 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31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