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자
59, 조르주 퀴비에(1769-1832) 이야기.(3/5)
=땅속의 화석에서 고생물을 복원하는 비교해부학의 개척자=
연구활동
졸업 후 학문적 직책 임명을 기다리던 그는 생계가 막막했다. 이에 1788년 7월, 프로테스탄트 귀족 엘리시 백작의 외아들의 가정교사로 노르망디 피캉빌 성에서 일하게 되었다.
1790년대 초, 그는 그곳에서 화석과 현생 생물의 비교를 시작했다. 또한 인근 발몽에서 열린 농업 회합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는데, 거기서 신분을 숨기고 있던 앙리 알렉상드르 테시에(1741–1837)를 알게 되었다. 그는 본래 의사이자 저명한 농학자로, 파리의 공포 정치로부터 피신해 있었다. 퀴비에는 그의 농업 강연을 듣고, 그가 『백과전서』(Encyclopédie Méthodique)의 농업 부문 논문 저자임을 알게 되어 이름을 밝혔다.
이에 놀란 테시에는 “나는 알려진 사람이기에 결국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답했다. 그 후 퀴비에는 당대 일류 박물학자들과 서신 교류를 시작했고, 파리로 초청받았다. 1795년 봄, 26세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곧 식물원의 동물 해부학 강좌 담당 장 클로드 메르트루(1728–1802)의 조수가 되었다. 1802년 메르트루가 세상을 떠나자 퀴비에가 후임이 되었고, 강좌는 비교해부학 강좌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프랑스 학사원이 설립되었고, 그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96년 4월 4일, 팡테옹 중앙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같은 달 국민연구소 개소식에서 최초의 고생물학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1800년에 『Mémoires sur les espèces d'éléphants vivants et fossil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두 번째 논문에서는 파라과이에서 발견된 대형 골격 표본을 기술·분석하여 ‘메가테리움’이라 명명했다. 그는 이 표본이 또 다른 멸종 동물이며, 그 두개골을 현생 수목성 동물인 나무늘보와 비교해 지상성 동물인 거대 나무늘보의 일종이라 결론지었다.
1796년에 발표된 이 두 논문은 고생물학과 비교해부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자 전환점이 되었으며, 퀴비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또한 멸종의 현실을 둘러싼 오랜 논쟁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1799년 그는 다웅땅(Daubenton)의 후임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박물학 교수가 되었다. 1802년에는 식물원 수석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 교육총감과 동행하는 연구소 사절로 임명되었다. 1806년에는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이 되었고, 1812년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외국인 회원이 되었다. 또한 1812년에는 네덜란드 왕립연구소 특파원이 되었고, 1827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22년에는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의 해외 명예회원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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