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자

세계의 과학자 39,월리스 흄 캐러더스(1896-1937) 이야기.(2)

간천(澗泉) naganchun 2025. 5. 6. 04:14

세계의 과학자 39,

월리스 흄 캐러더스(1896-1937) 이야기.(2)

==나일론 등의 합성 섬유, 합성고무를 발명하여 고분자과학과 화학 섬유 나일론의 아버지==

 

 

3, 학계에서의 경력

 

박사학위 취득 후 2년간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유기화학 강사로 재직했다.

192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기화학 강사로 임용되었다. 1933년에 하버드 대학교 총장이 된 제임스 B. 코넌트는 캐러더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캐러더스 박사는 당시부터 이미 이후 업적에서 드러나는 높은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남들과 같은 길을 따르지 않았고, 유기 반응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버드 시절부터 그는 중합 반응과 고분자 화합물의 분자 구조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1927, 듀폰사는 제품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기초 연구 부서를 새로이 설립하게 된다. 캐러더스는 델라웨어주 윌밍턴으로 가서 듀폰사의 새로운 유기화학 연구 부문 책임자가 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듀폰(DuPont)에 취업

학계를 떠난다는 결정은 캐러더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는 신경계에 장애가 있어, 그쪽에서는 지금보다 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며 듀폰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듀폰의 중역인 해밀턴 브래드쇼가 하버드로 직접 찾아가 설득에 나섰고, 그는 결국 이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월급은 267달러(연봉 3,200달러)였으나, 듀폰은 월급 500달러를 제시했다.

타키오에서의 룸메이트였던 윌코 마체탄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캐러더스는 우울증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고 있다.

 

합성고무인 네오프렌 (Neoprene) 제품화

 

1928년 2월 6일, 캐러더스는 듀폰의 연구 시설에 부임했다. 독일의 화학자 헤르만 슈타우딩거가 주장한 고분자 이론을 실증하기 위해 고분자 합성을 연구팀의 주제로 삼고, 에밀 피셔가 달성했던 분자량 4,200 이상의 합성을 목표로 삼았다.

같은 해 여름,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로저 애덤스와 석사과정을 지도했던 칼 마블을 컨설턴트로 초청했다. 그러나 1929년 중반까지도 분자량 4,000 이상의 고분자 합성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0년 1월, 엘머 K. 볼튼이 캐러더스의 직속 상사가 되었다. 볼튼은 구체적인 성과를 요구했고, 그 해 안에 그것은 달성되었다. 볼튼은 캐러더스에게 아세틸렌 고분자 연구를 지시했고, 이는 합성고무의 개발로 이어졌다. 1930년 4월, 캐러더스의 연구원 중 한 명인 아놀드 M. 콜린스가 클로로프렌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액체를 중합시켜 고무와 같은 고체 물질을 만들어냈고, 이를 제품화한 것이 세계 최초의 합성고무인 네오프렌이다.

 

같은 해, 캐러더스 팀의 일원이었던 줄리언 힐은 다시 분자량 4,000 이상의 폴리에스터 합성에 도전했다. 그는 곧 분자량 약 12,000의 고분자 합성에 성공하였고, 분자량이 높아진 덕분에 액체 상태였던 고분자를 섬유 형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비단을 대체하는 합성섬유로 실용화되었다.

폴리에스터와 폴리아미드는 단계성장중합(단계중합)의 응축중합 사례이다. 캐러더스는 이 단계성장중합 이론을 고안하여 평균 중합도와 단량체로부터 고분자까지의 중합률(수율)을 연결하는 ‘캐러더스의 방정식’을 도출하였다. 이 방정식은 단계성장중합에만 적용되며, 고분자량을 얻기 위해서는 높은 중합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힐은 또한 글리콜과 이가산을 감압하에서 가열하여 분자 증류기로 수분을 제거하고, 응축 반응을 유도하여 신축성 있는 강한 섬유를 합성하였다. 그러나 이 섬유는 뜨거운 물에 담그면 끈적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문제가 있어 제품화에는 실패하였다. 이에 실망한 캐러더스는 수년간 고분자 연구를 중단하게 된다.(계속)

 

출처= https://ja.wikipedia.org › wi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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