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자37,베르너 칼 하이젠베르그 이야기(2)
세계의 과학자37,
베르너 칼 하이젠베르그 이야기(2)
==「불확정성원리」를 제창한 양자역학의 창시자==
2, 교육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까지 뮌헨의 막시밀리안 학교에 다녔고, 뮌헨 대학에 진학하여 좀머펠트, 빈, 프링스하임, 로젠탈 밑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1922년에서 1923년 사이의 겨울 동안 그는 괴팅겐으로 가서 막스 보른, 프랑크, 힐베르트 밑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1923년 뮌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괴팅겐 대학에서 막스 보른의 조교가 되었고, 1924년에는 그 대학에서 베니아 레전디(venia legendi)를 받았다.
3, 연구 활동
1924 년부터 1925 년까지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닐스 보어 (Niels Bohr)와 함께 록펠러 그랜트 (Rockefeller Grant)와 함께 일했으며 1925 년 여름에 괴팅겐으로 돌아왔다.
1926년 그는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물리학 강사로 임명되었고, 1927년 26세의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29년에 그는 미국, 일본, 인도로 순회 강연을 갔다.
1941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와 다른 독일 물리학자들은 미군에 포로로 잡혀 영국으로 보내졌지만, 1946년 독일로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괴팅겐 물리학 연구소를 재조직했다. 이 연구소는 1948년에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48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영국 케임브리지에 몇 달 동안 머물면서 강연을 하였고, 1950년과 1954년에는 미국에서 강연을 하도록 초청받았다. 1955-1956년 겨울에 그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에서 기포드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는 나중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55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를 뮌헨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 여전히 이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그는 뮌헨으로 갔고 1958년에는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연구소는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 물리학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4, 노벨 물리학상 수상
하이젠베르크의 이름은 그가 겨우 23세였던 1925년에 발표된 그의 양자역학 이론과 항상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이론과 그 응용으로 특히 동종 형태의 수소를 발견한 공로로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새로운 이론은 관찰할 수 있는 것, 즉 원자가 방출하는 방사선에만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항상 주어진 시간에 전자에 우주의 위치를 할당할 수 없으며, 또한 그 궤도를 따라갈 수도 없기 때문에 닐스 보어(Niels Bohr)가 가정한 행성 궤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치, 속도 등과 같은 기계적 양은 일반 숫자가 아니라 "행렬"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수학적 구조로 표현되어야 하며 그는 행렬 방정식으로 새로운 이론을 공식화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