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의 생애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의 생애
1, 행복한 결혼 생활
하디자와의 만남
마호메트는 크라이슈(영-Quraysh) 4세기경부터 메카근교를 세력 판도로 하여 유목 및 교역을 하던 아랍인 부족) 족 중에서 유력한 하심가(Hashim/아랍왕족)의 태생인데 몰락해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려서 사망하여 마음씨 고운 숙부에게서 자랐다.
25세경 40세의 미망인 하디자(Khadīja bint Khuwailid, 555년- 619년)와 결혼하였다. 하디자는 사망한 남편의 유산을 가지고 사업에 성공하여 마호메트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이 결혼은 행복했던 것 같은데 5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호메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하는 말에 따르면 신장은 중간 정도이고 야윈 몸매에 어깨가 넓고 근골이 단단하고 가슴이 펴져있었다. 머리카락이 검고 곱슬머리로 약간 어깨까지 늘여 있었다. 만년에도 조금 흰머리가 섞일 정도이다. 미간이 길어서 흥분하면 미간에 혈관이 부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썹도 길고 무거우며 눈은 검고 컸다.
걸음이 빠르고 탄력이 있으며 걷는 발은 단단했다. 뒤돌아 볼 때는 온 몸을 돌렸다. 표정은 온화하고 사려 깊었으며 보통은 미소를 지으나 큰 소리로 웃지는 않았다.
생활은 간소하고 음식이나 복장 차림은 큰 권력을 가진 만년에도 조금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예외로 사치라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과 아비시니아(Abyssinia/현 에티오피아)의 제왕으로부터 받은 황금색 부츠가 한 벌 있었던 것이다. 냄새에는 민감해서 향신료를 매우 좋아했다.
마호메트의 다른 아내
하디쟈가 일찍 사망하고 마호메트는 51세 때에 새로운 아내를 맞았다. 새색시는 아이샤이다. 고참신자인 아브=비구르(후에 초대 카리프)의 딸로 겨우 9세였다.
--(인용)아이샤 자신이 후에 말한 바에 따르면 결혼식 당일도 그녀는 밖에서 친구들과 그네를 타고 있었다. 거기에 마중하는 사람이 와서 집으로 데려가 오 얼굴을 씻어주었는데 아직 숨이 찼으므로 잠시 쉰 다음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마호메트를 비롯하여 일군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아이샤의 생모가 이 작은 색시를 안고 사위의 무릎에 태워 형식대로 혼례의 인사를 말하고 알라의 축복을 빌었다. 그것으로 의식은 끝나고 열석한 사람들은 바쁜 듯이 흩어졌다.<마에지마 신지(前嶋信次『이슬람종교와 역사』1987 ぼんブックス p.14>--
아이샤는 그 후 마호메트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되었는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마호메트의 사후 미망인으로서 우대를 받았으나 마호메트의 딸 화디마의 남편 알 리와는 뜻이 맞지 않아서 656년에는 제3대 카리프 우스만이 암살된 후에 알 리가 제4대 카리프에 선출되자 반 알 리의 반란을 일으킨 우마이야가와 함께 알 리와 싸웠다. 아이샤는 낙타에 타서 전투를 지휘하였으므로 이 때의 전투를 <낙타의 전투>라고 말한다. 싸움에서는 패했으나 알 리는 아이샤를 정중히 대우하여 메디나로 보냈다.--우스만의 페이지를 참조--
*출처=https://www.y-history.net/appendix/wh0501-005.html
2, 40세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
하디자와 결혼한 후 마호메트는 메카에서도 유력한 유력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생활에도 여유가 생겨서 여가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마호메트는 자주 히라산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알라의 사자로서 일반인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달하는 숙명을 지고 있음을 전해 받았노라고 했다.
그때까지 그는 진실한 인물로서 메카의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는데 <신의 계시>를 말하기 시작해서는 마호메트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아내인 하디자는 남편을 믿고 최초의 이슬람교도로서 입신했다. 2번째의 신자는 10세인 종형제 알리이고 3번째 신자는 해방노예인 자이드(Zaid)였다.
다음으로 신자가 된 것은 마호메트의 사람 됨됨이에 반한 유력자인 아브드 알라(Abd Allah)이다. 그는 후의 아람=바크르로 알려진 모하마트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마호메트 사후에 초대 칼리프(Caliph/이슬람 지도자)가 된다.
3, 히즈라(Hijra/聖遷)와 움마(ummah/共同體)의 형성
히즈라((Hijra/聖遷/성천)의 개시
포교 개시 후 4년에 얻은 신자는 겨우 30명 정도였다. 일족의 장인 아브다=다리프는 입신은 거절하지만 <너의 가르침은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지킬 터이니 전도를 계속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 아브다=다리프와 마호메트의 아내 하디자가 이어서 사망하였다. 이어서 하심가를 계승한 것은 마호메트의 활동에 반대하는 아브=라하브였다.
아브= 라하브와 마호메트는 건건이 의견이 달랐기 때문에 이 이상 메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마호메트는 메카 이외의 장소에 활동 근거를 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신자를 서서히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시켰다. 이것이 622년의 히지라(성천)로 이것이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었다. 현재(2014년)는 이슬람력으로 하면 1392년이라 할 수 있다.
움마(공동체)의 형성
메디나로의 이주는 곤란이 수반되어서 모두가 일제히 메카를 떠날 수가 없었다. 떠날 준비도 어렵고 정착할 곳의 준비도 어려웠다. 이 히지라기의 교단의 결속은 한층 높았다.
이것이 움마(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제까지 일족이나 부족 단위로서의 결속이 기본이었던 아랍민족으로서 하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집단이 정돈된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4, 메카 무리와의 싸움
메카무리의 대상을 습격하다.
메디나에 거점을 옮긴 이슬람교단은 거기서 대소 61회나 싸움을 걸었다.
그 중에서 마호메트의 명령으로 행한 습격이 27회로 메카에서 홍해의 연안에 이르는 시리아로 향하는 대상을 습격하여 그 화물을 탈취하였다.
1회 대상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돈으로 1억 이상의 금액이 걸리는 때문에 이에 견디지 못하고 메카의 무리는 이슬람교단을 토벌하기 위한 토벌대를 조직한다.
비도르의 전투
624년 3월 팔레스티나의 가자를 출발한 대규모 대상이 메카를 목표로 남하하는 중이라는 정보를 획득하였다.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단 약 300명에게 습격을 명했는데 우마이야가의 아브=스판은 이것을 찰지하고 약 1000명의 지원군과 함께 홍해연안을 북상하였다.
대규모 토벌대가 북상하고 있음을 안 마호메트는 척후대의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전개한다.
이튿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마호메트의 군은 일제히 물이 고인 곳에 쇄도하여 모든 수원을 막고 말았다. 그래놓고 메카의 무리를 평원으로 유인하여 결전을 벌였다.
메카의 무리는 사자 70명, 포로70명을 내고 대패했다. 한편 이슬람 측 사자는 14명에 불과했다. 이슬람 측의 대승리였다. 승리한 마호메트군은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5, 메카 개선, 카바 신전을 이슬람화하다.
바도루전투, 메디나공방전
바도루 전투에서 패배한 메카의 무리는 통상로가 끊기는 위기에 직면했다.
625년 3월 메카의 무리는 병사 3000명, 낙타3000두, 말 200두인 대규모의 토벌대를 조직하여 통상로의 탈환을 목표로 메디나를 목표로 진군한다.
이에 대하여 이슬람교단 측은 병력은 적으나 잘 싸워서 결국 무승부가 되었다.
그 후 메카의 무리는 다시 병사 1만, 말 3000두를 이끌고 메디나를 포위했다.
이 때 마호메트는 메디나 주위에 참호를 파고 창 방패 펜스를 만들어 기병의 돌격에 대항하였다. 이것은 당시 아랍에서는 참신한 전법으로 페르시아인 무슬림의 지혜였다.
메카 정복
이슬람교단의 무용과 권위는 높아져서 아랍의 부족이나 유력자들이 귀의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라슈족을 비롯하여 유력한 메카의 무리는 차례차례로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630년 1월 약 1만의 대군을 이끌고 메디나에서 메카로 향한 마호메트는 저항을 받지 않고 메카에 입성하였다. 그 발로 카바신전을 향하여 그 안에 안치된 360의 우상을 파괴하였다.
카바신전의 최고의 신 하브루신상이 도괴되었을 때 <진리가 왔다. 허위의 것은 사라졌다.>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6, 이슬람가의 확대 그리고 죽음
아랍각지역의 여러 부족은 이후에 속속 이슬람으로 귀의하고 아라비아반도 전체에서 이슬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632년 2월 메카대제에서는 마호메트는 4만 명의 대중을 이끌고 메디나를 출발하여 대제의 지휘에 당한다. 그 때 신자에게 호소하였다.
여러분 모두 들으시오. 당신들의 피와 재산은 당신네들이 이 세상의 주(알라)와 서로 만날 때까지 신성하여 범하지 못한다. (약) 아내를 위로하고 노예를 학대하지 마라. 따뜻한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약) 여러분 모든 무슬림은 다른 모든 무슬림의 형제이고 우리의 몸은 모두 평등하다.
이것이 최후의 마호메트의 메카에서의 모습이 된다.
메디아에 돌아와서 바로 용태가 악화하여 격한 두통을 일으켜서 어린 아내 아이샤의 간호도 허무하게 사거하였다.
유해는 임종한 방의 마루를 파서 묻었다. *
* 일본어원문=3分でわかる、イスラム教の創始者ムハンマドの生涯
* 출처=https://reki.hatenablog.com/entry/2014/11/14...
7, 마호메트의 후계자
632년에 마호메트는 사거하였다. 이슬람교도(무슬림)가 결성한 교단(움마)를 지도할 마호메트의 후계자 카리프로서의 초기의 개종자로서 장로인 아브=바쿠르를 선출하였다.
이후 4대의 카리프가 선출되는 시대가 이어져서 그것을 정통 카리프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윽고 누구를 마호메트의 정통 후계자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통 카리프시대에서 이미 대립이 있어서 다음의 우마이야가의 무아위야가 카리프가 되자 그것을 계기로 교단의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정통 카리프시대
정통카리프시대에 그때까지 마호메트의 입으로 말해진 신의 말씀이라 했던 장구를 암송하여 전해졌으나 3대 카리프 우스만 때에 <코란>이라 하여 정리되어 이슬람교의 성전이 되었다. 마호메트의 사상과 행동은 다시 세부에 이르는 전승을 집대성한 <하디스>라 하여 정리되어 이것들이 샤리아(법)으로 하여 이슬람세계를 규율하여 왔다.
또 정통 카리프시대에는 이슬람의 가르침은 아랍인에게 널리 전파되고 적대하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지라드)이 전개되었다. 마호메트가 창시한 알라에 대한 신앙도 국가 통치와 맺어진 이슬람교국가는 다시 확대를 계속하여 주변의 아랍인 이외도 지배하에 넣어서 이슬람제국으로 발전해간다.
마호메트의 시대
마호메트의 시대는(570년-632년) 서양에서는 프랑스는 메로위그조, 영국은 7왕시대, 이베리아반도에는 서 코트왕국 등 게르만제국의 봉건사회의 형성기에 해당하고 로마교회는 구레고리우스1세(재위590-604)가 나와서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는 시기였다. 다시 지중해 동 절반에서 소아시아에 걸쳐서는 비잔틴제국이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수(隨)에 이어서 당제국이 발흥할 때이고 마호메트는 당나라 고조(李淵)(565-635)나 일본의 성덕태자(574-622)와 동시대 사람이다.*
*출처=https://www.y-history.net/appendix/wh0501-0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