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요새 (要塞)는 없다
2020 ‘내가 쓰고 싶은 특집’ ‘반지의 제왕’을 소환하다
(28) 요새 (要塞)는 없다
요새 (these days), 요즘은 온통 바이러스가 우리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를 포위하는 데서 나아가 인류의 생활 전체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으킨 강도 9도의 지진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도피할 요새 (要塞)는 따로 없는 것 같다.
그 산의 돌출부에 방어망을 갖춘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돌로 쌓은 일곱 개의 성벽은 어찌나 견고하고 해묵어 보이는지 흡사 인간이 아니라 거인의 손으로 대지의 뼈를 빚어 만들어 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성내의 들판은 널찍한 경작지들이 펼쳐지고 군데군데 과수원이 자리 잡은 풍성한 대지로서 농가마다 건조용 솔과 곡식 창고, 우리와 축사들이 갖춰져 있었으며, 고지대의 숲으로부터 여러 줄기의 냇물들이 안두인 강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목자와 농사꾼은 많지 않았고, 곤도르인 대부분은 도시를 이루고 있는 일곱 겹 원형 성내나 롯사르나흐의 고산지 계곡, 또는 더 남쪽으로 다섯 개의 급류가 흐르는 아름다운 레벤닌에 살고 있었다. <반지의 제왕 5권 p. 14>
본성은 실로 견고한 요새로서, 성 안에 무기를 잡을 수 있는 병사가 있기만 하다면 적의 대군이 몰려오더라도 쉽게 탈취되지 않을 곳이었다. 후면으로 돌아온 적병이 민돌루인의 기슭을 기어올라 방비의 산과 연결된 좁은 능선을 따라 침입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성벽과 높이가 맞는 그 능선 역시 서쪽 끝에 솟아 있는 절벽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누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5권 p. 16 -17>
요새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방어 시설. 또는 그런 시설을 한 곳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끼리 싸우는 전쟁에서 요새는 요긴한 피난처가 되어 주겠지만, 바이러스가 차지하거나 달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는 어디일까? 어떤 것일까?
작년에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OCN에서 방영한 드라마(2019.08.31. ~ 2019.10.06. 방영종료 10부작) 이다. 상경한 청년이 서울의 낯선 고시원 생활 속에서 타인이 만들어낸 지옥을 경험하는 미스터리라고 한다. 그 드라마를 자세히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소재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조카가 지방에서 상경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고시촌의 한 방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보고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책상 하나에 겨우 누울만한 자리가 전부인 고시원 방이다. 옆방과 함께 보일러를 사용해야 하는데 추워도 서로 동의를 해야 보일러를 틀 수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원룸이나 고시원이니 시설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었다. 벽간 소음도 소음이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그냥 무시되는 공간이다. 그렇게 다닥다닥 붙은 방이니 어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고 심신을 쉬게 할 수 있었을까. 바로 그런 환경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tvN 이란 방송국에서 했던 ‘응답하라 1988’ 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덕선이와 언니는 항상 싸운다. 같은 방을 쓰면서 매일 티격태격. 그런데 언니가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사시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시원으로 옮긴다. 어느 날 집에서 어머니가 언니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면서 반찬을 들려 보낸다. 언니는 따로 집을 나가서 살아서 좋을 것이라고만 여기던 동생은 언니가 머무는 고시원 방을 보고 왈칵 엉엉 목 놓아 울어버린다. 좋은 곳에서 편하게 지내는 줄로 알고 언니를 얄미워하던 덕선이는 그렇게 좁고 열악한 환경인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고 당황스럽고 언니를 미워한 것이 후회가 된 것이다.
고시원 이야기로 조금 빗나갔지만, 어쩌면 바이러스는 마치 인간과 인간이 애써 거리두기를 권하는 모양새다. 서로 다독여주고 이웃 간에 정을 나누며 다정하게 살아 온, 그런 인간의 라이프스타일을 아예 구겨버리라고 바이러스는 부추기는 것 같다.
바이러스가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어떤 적이라면 이렇게 오래 끌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유행하는 바이러스의 정체, 그 바이러스의 맹점을 빨리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만을 하면서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요새 안에 갇혀서 영원히 살아갈 수 없다. 성문 밖으로 나와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옆 마을로 마실도 가고, 꽃피는 봄에 꽃구경도 하고, 숲으로 땔감을 마련하러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