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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월요단상

화(化)하다

간천(澗泉) naganchun 2012. 7. 9. 05:21

 

화(化)하다

 

 

 

초록색을 띈 가느다란 몸매를 한 야채에 오이가 있다. 이 오이는 우리가 보통 아는 그 모양일 때 따지 않고 그냥 마냥 놔두게 되면, 시간이 흘러 둥글게 둥들게 살이 오동통 쪄서 원래 우리가 알던 크기보다 둘레도 길이도 약 3배정도 커진 괴물로 바뀐다. 그리고 색도 누리끼리해지고 피부에는 살이 튼 것처럼 줄이 가 있기도 하다. 즉, 모양새가 일반 오이와는 많은 차이가 난 식물로 바뀐다.

 

여기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 물체 혹은 생물의 본연의 보편적으로 생각되던 원래의 모습에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 모양새가 바뀌어, 마치 다른 생물이 아닌가 하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 ‘괴물’로 바뀌었다고 한 것이다.

 

호박죽을 끓이는 그 둥근 호박도 원래부터 그렇게 노랗고, 피자 한 쪽씩 붙어 있는 것처럼 원을 이룬 그런 늙은 호박의 모양새로 처음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애호박 같은 것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호박은 이름이 젊으나 늙어서나 이름이 바뀌지 않고 ‘호박’이다. 그 앞에 ‘애’ 호박, ‘늙은’호박이라고 해서 구분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이는 아니다. 이팔청춘일 때 ‘오이’는 늙으면 ‘늙은 오이’라 하지 않고 그 이름이 바뀐다. ‘노각’이라고 한다. 노각은 늙어서 빛이 누렇게 된 오이를 말한다.

 

<젊은 오이네 집에 이 늙은 오이가 찾아왔다. 오이 문중에 큰 모임이 있어서 어르신 오이가 찾아 온 것이다. 그런데 젊은 오이네 아이들은 처음 보는 그 늙은 오이가 자기네와는 다른 종족으로 여기고 검문검색을 하거나 ‘누구세요?’라고 묻는 등, 배격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젊은 오이네 아버지(철이 든)가 대문에 나서서 그 ‘문중 어르신 오이’인 원로오이를 알아보고 나서야 집 안으로 모시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

 

위의 이야기는 오이와 노각을 생각하면서 가상으로 생각해 본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오이는 ‘오이’이고 오이가 ‘노각’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 수도 있다. 강아지는 태어난 순간 눈에 보이는 동물이 자기 엄마로 알고 항상 따라다닌다는 것처럼, 우리는 자기가 접한 어느 한 시점을 가지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여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자기가 아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시점에 조우한 대상이나 사건, 내용 그 자체만을 보고, 그 이면이나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않으려 하고, 그게 다 인 것처럼 단정 짓는 일 말이다. 어떤 것을 둘러싼 과정이나 경과, 되어지는 양상, 변화되어질 상황 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하려고도 않는 습성이 있지 않을까?

 

사람도 태어나서 아이가 되어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늙어가고 변해가는데, 하루살이는 자기가 만난 인간이 ‘아이’이면 인간은 모두 ‘아이’만 있는 것으로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가 조우한 그 순간의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것이 化하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도 그 안의 본질은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말이다. 오이와 노각은 전혀 다르다고 우기는 사소한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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